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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바돌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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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이탈리아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1871년 그라차노 몬페라토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 참전했으며, 1919년 육군 참모총장, 1925년 국방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베니토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에 반대하여 잠시 군에서 추방되기도 했지만, 이후 파시즘 정권과 협력하며 리비아 총독과 에티오피아 침공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총리로 임명되어 연합국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으나, 독일의 침공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는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에서 자행한 잔혹 행위로 전쟁 범죄 비판을 받았으며, 195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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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로 바돌리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함Maresciallo d'Italia
이름제1대 아디스아베바 공작
출생일1871년 9월 28일
사망일1956년 11월 1일
출생지피에몬테주그라차노 몬페라토, 이탈리아 왕국
사망지이탈리아 피에몬테주 그라차노 바돌리오
국적이탈리아인
정당무소속
배우자소피아 발라니아 (1904년 결혼, 1942년 사별)
군 경력
소속이탈리아 왕국군
복무 기간1892년 – 1943년
계급이탈리아 원수
참전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리비아 평정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정치 경력
직위이탈리아 왕국의 총리
국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부총리팔미로 톨리아티
임기 시작1943년 7월 25일
임기 종료1944년 6월 8일
이전 총리베니토 무솔리니
다음 총리이바노에 보노미
외무부 장관이탈리아 외무부 장관
외무부 장관 임기 시작1944년 2월 11일
외무부 장관 임기 종료1944년 6월 8일
총리본인
이전 외무부 장관라파엘레 과릴리아
다음 외무부 장관이바노에 보노미
식민지부 장관이탈리아 아프리카 장관
식민지부 장관 임기 시작1944년 2월 11일
식민지부 장관 임기 종료1944년 6월 8일
총리본인
이전 식민지부 장관멜키아데 가바
다음 식민지부 장관이바노에 보노미
동아프리카 총독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총독, 이탈리아령 에티오피아 부왕
동아프리카 총독 임기 시작1936년 5월 9일
동아프리카 총독 임기 종료1936년 6월 11일
국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총통베니토 무솔리니
이전 동아프리카 총독직책 신설
다음 동아프리카 총독로돌포 그라치아니
동아프리카 특사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특사
동아프리카 특사 임기 시작1935년 11월 28일
동아프리카 특사 임기 종료1936년 5월 9일
이전 동아프리카 특사에밀리오 데 보노
다음 동아프리카 특사직책 폐지
에리트레아 총독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총독
에리트레아 총독 임기 시작1935년 11월 22일
에리트레아 총독 임기 종료1936년 5월 9일
이전 에리트레아 총독에밀리오 데 보노
다음 에리트레아 총독알프레도 구초니
트리폴리타니아/키레나이카 총독이탈리아령 트리폴리타니아 및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 총독
트리폴리타니아/키레나이카 총독 임기 시작1929년 1월 24일
트리폴리타니아/키레나이카 총독 임기 종료1933년 12월 31일
이전 트리폴리타니아/키레나이카 총독에밀리오 데 보노 (트리폴리타니아) / 아틸리오 테루치 (키레나이카)
다음 트리폴리타니아/키레나이카 총독이탈로 발보 (리비아 총독)
군사 경력
참모총장이탈리아 왕국군 참모총장
참모총장 임기 시작1919년 11월 25일
참모총장 임기 종료1921년 2월 2일
이전 참모총장아르만도 디아스
다음 참모총장주세페 바카리
참모총장 임기 시작 (2)1925년 5월 4일
참모총장 임기 종료 (2)1927년 2월 1일
이전 참모총장 (2)주세페 프란체스코 페라리
다음 참모총장 (2)주세페 프란체스코 페라리

2. 생애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1871년 이탈리아 그라차노 몬페라토에서 태어나 토리노 왕립 군사 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복무했다.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이탈리아-투르크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등 여러 전쟁에 참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1919년 육군 참모총장, 1924년 브라질 대사, 1925년 전군 참모총장을 역임했으며, 1926년에는 이탈리아 원수가 되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는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을 지냈다.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 하에서 1935년부터 1936년까지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에티오피아 제국 부왕에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0년에는 소극적인 활동을 이유로 참모총장직을 사퇴했으나, 1943년 무솔리니 실각 후 총리에 임명되어 반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했다. 1943년 9월 연합군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나치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다. 1944년 로마 해방 이후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1871년 이탈리아 그라차노 몬페라토에서 태어난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1888년 10월 5일 토리노 왕립 군사 학교에 입학했다. 1890년 소위 계급을 받았으며, 1892년 학업을 마치고 중위로 진급했다.[19] 이후 ''레지오 에제르시토''(이탈리아 왕립 육군)에서 포병 소위(''테넨테'')로 복무했다.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과 이탈리아-투르크 전쟁에 참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이탈리아 측 대표로 휴전 교섭에 참여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했을 당시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중령이었다. 1916년 5월 몬테 사보티노 점령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소장으로 진급했고, 1917년 말에는 중장으로 참모차장에 임명되었다.[3] 1917년 10월 24일 카포레토 전투의 참패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조사 위원회는 그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을 기각했다.[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수년간 그는 이탈리아 왕립 육군에서 여러 고위직을 역임하면서 카포레토 전투 패배에서 자신의 역할을 숨기기 위해 공식 문서를 수정하는 데 지속적으로 노력했다.[4]

2. 3. 전간기: 파시즘 정권과의 협력

1919년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한 바돌리오는 1922년 베니토 무솔리니로마 진군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여 파시스트 정권과 대립하는 듯 보였다. 이로 인해 군에서 추방되어 브라질 대사로 좌천되기도 했다.[5] 그러나 이후 정치적 변심으로 파시즘 정권에 협력하게 되었고, 1925년 국방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1926년에는 이탈리아 원수로 승진했으며, 1928년에는 이탈리아 국왕으로부터 사보티노 후작 작위를 받았다.

2. 4. 리비아 총독 (1929-1933)

바돌리오는 1929년부터 1933년까지 트리폴리타니아키레나이카(나중에 이탈리아령 리비아로 통합됨)[5]의 첫 번째 단독 총독이었다. 그는 총독 재임 기간 동안 키레나이카 부총독 로돌포 그라치아니와 함께 거의 집단 학살에 가까운 작전을 펼쳐 리비아 저항을 격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0년 6월 20일, 바돌리오는 그라치아니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전반적인 전략과 관련하여, 통제된 인구와 반군 세력 간에 뚜렷하고 중요한 분리를 만들어야 한다. 나는 이 조치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숨기지 않으며, 이는 정복된 인구의 몰락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방향이 정해졌고, 키레나이카의 모든 인구가 멸망해야 할지라도 우리는 끝까지 이행해야 한다."[6] 1931년까지 키레나이카 인구의 절반 이상이 15개의 수용소에 갇혔고, 그곳에서 과밀 수용(물, 음식, 의약품 부족)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사망했으며, 바돌리오의 공군은 사막의 베두인 반군을 상대로 화학 무기를 사용했다.[7] 1932년 1월 24일(임명 3주년) 바돌리오는 1911년 이탈리아 침공 이후 처음으로 리비아 저항의 종식을 선언했다.

2. 5.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935-1936)

1935년 10월 3일, 에티오피아 침공이 너무 느리다고 판단한 베니토 무솔리니는 에밀리오 데 보노를 해임하고, 그동안 데 보노에게 서한 공세를 펼치던 바돌리오를 후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8] 바돌리오는 화학 무기 사용 허가를 요청하여 승인받았는데, 이는 "크리스마스 공세" 당시 추락한 이탈리아 조종사 티토 민니티의 고문과 살해를 명분으로 삼았다.

바돌리오는 겨자 가스를 사용하여 북부 전선에서 에티오피아 군대를 효과적으로 파괴했다.[8] 그는 제1차 템비엔 전투, 암바 아라담 전투, 제2차 템비엔 전투, 시레 전투에서 이탈리아 침공군을 지휘했다.[8] 1936년 3월 31일, 마이체우 전투에서 에티오피아 황제 하이레 셀라시에가 지휘하는 북부 전선의 마지막 에티오피아 군대를 격파했다.[8] 4월 26일,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점령을 위한 "철의 의지 행진"을 시작했고, 5월 2일 하이레 셀라시에는 국외로 도피했다.

1936년 5월 5일, 바돌리오는 승리한 이탈리아 군대를 이끌고 아디스아바바에 입성했다.[8] 무솔리니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에티오피아 황제로 선언하고, 에티오피아를 이탈리아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8] 바돌리오는 에티오피아의 초대 부왕총독으로 임명되었고, 아디스아바바 공작 작위를 받았다.[8]

2. 6. 제2차 세계 대전

1940년 그리스 침공에서 이탈리아군이 부진한 성과를 거두자, 바돌리오는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우고 카발레로로 교체되었다.[9] 바돌리오는 1925년부터 1940년까지 참모총장을 역임하며 군사 환경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무솔리니의 참전 결정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1943년 초, 이탈리아 군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휴전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무솔리니는 휴전 협정에 서명하려 하지 않았고, 연합군도 그와 휴전 협정을 체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거될 필요가 있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파시스트 체제를 지속하는 데 전념하는 장교를 원했고, 1940년 그리스 침공 실패에 대한 희생양으로 삼은 것에 대해 무솔리니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지만 무솔리니를 충실히 섬기고 에티오피아에서 많은 만행을 저지른 바돌리오를 선택했다.[11]

2. 7. 무솔리니 실각과 총리 취임 (1943)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은 바돌리오를 총리로 임명했다.[14] 바돌리오는 반파시스트 정권을 수립하고, 1943년 9월 연합군과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14] 주세페 카스텔라노 장군은 카시빌레에서 바돌리오를 대신하여 연합국과의 이탈리아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14]

바돌리오는 휴전에 대한 독일의 반발을 우려하여 조약의 공식 발표를 망설였다.[14] 1943년 9월 8일, 연합군이 휴전 문서를 바돌리오 선언으로 발표했을 때, 바돌리오는 이탈리아 군대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아 혼란이 발생했다. 이탈리아 왕립 육군, 왕립 해군, 왕립 공군의 부대는 독일군의 무장 해제 조치에 대비하지 못했다.

1943년 9월 9일 새벽, 바돌리오와 국왕, 일부 군사 장관 및 참모총장은 연합군의 보호를 구하며 페스카라브린디시로 탈출했다.[4] 1943년 9월 29일, 몰타에서 더 긴 버전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1943년 10월 13일, 바돌리오와 이탈리아 왕국은 공식적으로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15]

2. 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4년 로마 해방 이후, 바돌리오는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이바노에 보노미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었다.[16][17][18] 냉전 시기, 바돌리오는 반공산주의적 입장을 인정받아 아프리카에서 저지른 이탈리아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을 면했다.[16][17][18]

2. 9. 사망

1956년 11월 1일, 고향 그라차노 바돌리오(코무네)에서 천식 발작으로 85세의 생애를 마쳤다.[2]

3. 가족

1904년 소피아 발라니아(Sofia Valania)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1] 그의 손자 피에트로 (1939년1992년)는 2대 아디스아베바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1] 피에트로 바돌리오의 장남 플라비오(1973년 출생)는 현재 3대 아디스아베바 공작이다.[1]

4. 논란 및 비판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 시절, 바돌리오는 민간인에 대한 독가스 사용, 무차별 폭격 등 잔혹 행위를 자행했다. 이는 전쟁 범죄로 비판받는다.[7] 특히 에티오피아 전쟁 중 독가스 사용은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된다.[19] 에티오피아 측은 이탈리아군 포로 학살 등 전쟁 범죄에 대한 보복이었다고 주장하나,[22][23]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 행위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기회주의적인 행보를 보이며,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에 협력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1][12] 1943년 무솔리니 실각 이후 총리에 임명되어 연합군과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초기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14]

냉전 시기, 영국은 바돌리오를 반공주의자로 간주하여 그의 전쟁 범죄를 묵인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6][17][18]

5. 유산

바돌리오는 이탈리아에서 논쟁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군사적 업적은 인정받기도 하지만, 제2차 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독가스를 사용하는 등[19] 식민지 지배와 전쟁 범죄, 파시즘 협력과 같은 어두운 면모는 비판받는다. 그의 고향은 그의 이름을 따 '그라차노 바돌리오'로 개명되었으나, 이는 그의 논란적인 행적을 고려할 때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Badoglio 2019-08-10
[2] 백과사전 Pietro Badoglio https://www.britanni[...] 2023-10-28
[3] EB1922 Badoglio, Pietro
[4] 서적 Generali Mondadori
[5] 문서 Giovanni Ameglio and Vincenzo Garioni were also unique governors of Tripolitania and Cyrenaica, but this seemed to be a temporary, not permanent, policy.
[6] 간행물 "Mussolini's Follies: Fascism in Its Imperial and Racist Phase, 1935–1940" 2004-05
[7] 간행물 "Mussolini's Follies: Fascism in Its Imperial and Racist Phase, 1935–1940" 2004-05
[8] 잡지 Guard Changed http://content.time.[...] 1936-06-22
[9] 서적 Mussolini Paladin 1983
[10] 서적 Italy and Its Monarchy Yale University Press 1989
[11] 서적 Italy and Its Monarchy Yale University Press 1989
[12] 서적 Italy and Its Monarchy Yale University Press 1989
[13] 서적 Italy and Its Monarchy Yale University Press 1989
[14] 서적 The Day of Battle:The War in Sicily and Italy, 1943–1944 Henry Holt and Co 2007
[15] 웹사이트 https://www.treccani[...]
[16] 학술지 Britain and the 'Hand-over' of Italian War Criminals to Yugoslavia, 1945–48 2004-01-01
[17] 웹사이트 Criminali di guerra Italiani http://www.odradek.i[...] Odradek Edizioni 2012-10-14
[18] 서적 Italiani senza onore: I crimini in Jugoslavia e i processi negati (1941–1951) http://www.ombrecort[...] Ombre Corte 2005
[19] 뉴스 ムッソリーニ首相、エチオピア併合宣言 東京朝日新聞 1936-05-07
[20] 뉴스 ムッソリーニ首相辞任、後任バドリオ 毎日新聞(東京) 1943-07-27
[21] 뉴스 首相にボノミ、共産党が入閣 朝日新聞 1944-06-11
[22] 서적 Mussolini: A New Life Phoenix Press 2003
[23] 서적 ムッソリーニ 白水社 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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